[박권일의 다이내믹 도넛] 차별금지법, 가장 탁월한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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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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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의 인식 자체가 모순적이다. 한국인들은 학력·학벌 차별을 인종차별보다 심각한 문제로 보면서도 한편으로 학력·학벌을 “인간 능력의 구현체”라고 믿는다. 다른 국가들과 달리 평등보다 불평등을 선호하며 ‘자질과 능력’에 따른 차별에 대다수가 동의한다. 또한 ‘학력’차별은 괜찮지만 ‘학벌’차별은 안 된다는 사람도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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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이라는 말을 들으면, 엄마가 남동생에겐 ‘줄줄이 비엔나’를 도시락 반찬으로 넣어주고 자기한텐 ‘분홍 소시지’를 줬다고 나직이 중얼거리던 초등학교 때 여자 친구의 한 맺힌 표정이 떠오른다
그때 여자 친구들은 가족들에게만이 아니라 학교에서도 차별받았다. 여자 반장에게 유독 까칠하게 대하던 교사는 ‘특별히 여자를 반장으로 뽑아줬으니 매사 모범을 보이고 더 조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남중을 거쳐 남고에 입학하니 성적에 따른 차별이 극에 달했다. ‘네시간 자면 마누라 얼굴이 바뀐다’는 소리를 재치 있는 명언이랍시고 늘어놓는 교사들이 득실거렸다.
성적이 좋은 편이었던 나는 대개 우호적인 관심을 받았지만, 그렇지 않은 친구들은 교사들에게 벌레처럼 밟히고 맞았다.
훗날 영화 <친구>에서 “느그 아부지 뭐 하시노!”라며 학생을 두들겨 패는 장면에서 관객들이 폭소를 터뜨릴 때, 나는 웃기는커녕 차갑게 피가 식는 기분이었다. 실제로 겪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 시절 나는 월간 <말> 같은 진보매체들,
몇몇 유명한 사회과학 고전들을 몰래 찾아 읽으며 이른바 ‘자생적 운동권’이 돼가던 중이었다. 그때 나는 학교와 교사들을 증오한다고 여겼지만, 돌아보면 부당한 폭력에 저항조차 못한 스스로에 대한 혐오가 훨씬 더 컸던 것 같다.
야만은 예전에 비해 확실히 줄었다. 특히 학교 현장의 물리적 폭력은, 사라지진 않았지만 크게 나아진 듯하다. 그러나 ‘차별’이라는 문제에서 한국은 갈 길이 멀다. 남아선호 경향이 줄긴 했지만 여성 차별은 여전히 공고하다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던 20대 대통령 윤석열의 말은 자체로 오류이자 차별의 심각성을 웅변한다
회계법인 딜로이트의 보고서에 따르면, 2021년 기준 한국 기업 이사회에 등록된 여성 비율은 4.2%에 불과했다. 한국은 카타르 (1.2%), 사우디아라비아 (1.7%), 쿠웨이트 (4%), 아랍에미리트 (5.3%) 등 이슬람 국가들과 함께 최하위 5개국 중 하나다.
뿐만 아니라 인종, 장애, 국가, 종교, 성적 지향, 고용 형태, 학력 등 숱한 영역에서 심각한 차별, 배제, 혐오 표현들이 나타나고 있다.
2020년 ‘한국 사회의 인종차별 실태와 인종차별 철폐를 위한 법제화 연구’에 따르면, 이주민 응답자 10명 중 7명, 공무원·교원 10명 중 9명이 한국에 대체로 인종차별이 존재한다고 답했다. 국가인권위원회의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에 따른 차별 실태조사’는 청소년 성소수자 98%가 학교에서 교사나 다른 학생들로부터 ‘혐오 표현’을 경험했음을 보여준다.
한편 유럽과 한국의 차별 인식을 비교한 한국여성정책연구원 보고서에 따르면, ‘인종차별’이 가장 심각하다고 답한 유럽과 달리 한국 시민들은 ‘학력·학벌 차별’을 가장 심각한 문제로 꼽았다. 이는 시험 성적에 따른 지대, 즉 불로소득을 극단적으로 추구하는 한국 특유의 능력주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학력·학벌 차별, 고용 형태에 따른 차별은 차별금지법이 통과되더라도 첨예한 쟁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대중의 인식 자체가 모순적이다. 한국인들은 학력·학벌 차별을 인종차별보다 심각한 문제로 보면서도 한편으로 학력·학벌을
“인간 능력의 구현체”라고 믿는다. 다른 국가들과 달리 평등보다 불평등을 선호하며 ‘자질과 능력’에 따른 차별에 대다수가 동의한다. 또한 ‘학력’차별은 괜찮지만 ‘학벌’차별은 안 된다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러나 차별금지법은 학력·학벌(학위 및 학교 명성)과 업무가 결정적인 관련이 없음에도 고용과 임금에서 불합리하게 차별하는 행위를 규제하는 것이므로, 학력과 학벌의 구별은 부차적이다
고용과 노동의 비합리적인 차별은 헌법적 가치는 물론 창조하고 발전하려는 개인의 동기를 해치며 생산성을 떨어뜨린다. 신뢰가 부족한 사회에서 시민들끼리 존중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다름을 이해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 각자의 생각을 공식적인 논의의 장에 올려놓고 경합시켜야 한다. 차별금지법 내용을 읽어보면 누구나 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