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리가 낳고 코로나가 키운 ‘스몰 럭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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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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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의 취미였던 차, 젊은층 중심으로 뜨거운 관심
셀럽 마케팅에 홈카페 영향…찻잔·거름망 판매 급증
서울 북촌·청담동·한남동 등 티하우스 명소 인기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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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 사업을 접으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2~3년 전부터 젊은층을 중심으로 급격하게 차 인기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신기했다.”
지난 5일 서울 종로구 통인동 호전다실의 박재형(43) 대표가 능숙한 솜씨로 차를 내리면서 말했다. “대학생 때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우연히 거래처 사장님이 권해준 차를 마시고 차의 매력에 푹 빠졌다”는 박 대표는 2012년부터 차를 직접 수입·유통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호전다실은 그가 운영하는 차 시음장이다.
박 대표가 폐업을 고민할 정도로 한동안 차 시장은 좋지 않았다. 2000년대 초 한국에 갑자기 보이차 열풍이 불어닥친 적이 있었다
보이차만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잡지가 창간되고 회사 안에 보이차 동호회가 생겨날 정도였다
하지만 인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당시 와인처럼 반짝인기였다. 박 대표는 “차 애호가들이 늘어나자 품질 좋은 보이차 가격이 급등했다. 가격이 접근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싸지니 젊은층이 외면했다.
시장에 신규 유입이 안 된 것이다. 노년층의 취미로 인식되면서 인기가 떨어졌다”고 말했다.
차의 인기는 그렇게 사그라지는 거 같았다. 하지만 뜻밖의 부활은 ‘셀럽’을 통해 시작됐다. 대표 주자가 가수 이효리다. “이효리가 <효리네 민박>에서 보이차를 마시는 장면이 나왔다. 시청자들이 보기에 그 장면이 너무 예쁘고 신기했던 것 같다.
이효리뿐만 아니고 다른 셀럽들이 보이차를 마시는 장면이 자주 화면에 노출됐다. 그때부터 시장에서 반응이 왔다.” 박 대표의 말이다.
군불을 때던 차의 인기는 코로나19라는 복병을 만나면서 급기야 폭발 지경에 이르렀다. 집콕으로 인한 홈카페 만들기가 사회현상이 되자, 차 시장 자체가 엄청나게 확장된 것이다.
차 자체뿐만 아니라 특히 차를 내리고 마실 때 쓰는 다구의 인기도 급상승했다. 온라인 상거래업
체인 옥션에 따르면 코로나 창궐 이듬해인 2021년 1분기 차 거름망의 판매가 전년 같은 기간에 견줘 두배 이상(143%)
찻잔의 판매가 열배 이상(1410%) 늘었다. 옥션 관계자는 “집콕 라이프스타일로 인해 자리잡은 홈카페 문화가 매출 상승의 원인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실제 차에 빠진 사람들은 다구에 관심이 높다. 공예품의 가치도 있는데다가, 특히 보이차를 마시는 방법인 ‘공부차’의 화려한 퍼포먼스에 매료되는 사람이 많다.
공부차는 일종의 중국식 다도다. 공부차에서 쓰는 다구는 일반적으로 한국과 일본에서 쓰는 다구보다 작고 앙증맞아 눈길을 확 끈다. 소꿉놀이처럼 느껴질 정도다. 이런 작은 깨알 아이템이 수집의 대상이 되고, 차 시장 전체를 키우는 상황이다.
엠제트(MZ) 세대를 중심으로 한 ‘스몰 럭셔리’ 현상도 차 인기를 확산시키는 요인으로 지목된다. 대를 이어 차를 판매해오고 있는 서울 용산구 무심헌의 김인웅(39) 공동대표는 “최근 차의 인기는 일종의 풍선 효과다
와인과 위스키로 이어진 인기가 이제는 차로 오고 있는 것”이라며 “디테일한 맛을 구분하는 재미가 차에도 존재한다.
하지만 와인과 위스키보다 진입 장벽이 낮다. 20대에게 이색 데이트 코스로도 차 테이스팅이 인기다”라고 말했다
무심헌에서도 차 테이스팅 코스를 운영 중인데, 1인당 2만원으로 한시간 동안 두 종류의 차를 시음할 수 있다. 스페셜티 커피 한잔에 1만원 이상 하는 상황에서 나쁘지 않은 가격대다.
복잡한 차의 분류도 매력 포인트다. 차는 찻잎의 산화 정도에 따라 녹차-백차-황차-청차-홍차-흑차 순으로 구분한다. 대표적으로 우리가 흔히 아는 우롱차는 청차, 보이차는 흑차다.
이 산화 단계 안에서 원산지와 찻잎 등급, 가공 방식, 후발효 여부 등으로 또 나뉜다. 우리가 흔히 보이차를 마신다고 하지만, 실제론 시음장에 가면 6단계의 차를 골고루 맛보게 해준다
손님들은 그때서야 보이차가 차의 전부가 아니란 것을 알게 된다. 깊게 파면 팔수록 어려워지는 게 차다. 업계에선 “와인이 장기라면 차는 바둑이다”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고 한다.
차를 마시는 연령이 내려가고, 저변이 확대되자 이른바 ‘힙한’ 가게들도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다. 이미 서울 북촌의 델픽, 한남동의 산수화티하우스는 인스타그램에서 ‘좋아요’를 많이
받는 힙플레이스다. 그 가운데 서울 강남구 청담동의 ‘내추럴보이’와, 서울 북촌마을의 ‘월하보이’는 이색적인 콘셉트로 관심을 받고 있다.
내추럴보이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내추럴와인과 보이차를 함께 파는 매장이다. 현재 시장에서 가장 핫한 음식의 만남이랄까. 정구현(38) 대표는 차가 막 뜨기 시작했던 2019년에 이곳을 열었다. 왜 내추럴와인과 보이차일까
그는 ‘발효’라는 접점을 얘기했다. “내추럴와인은 효모의 느낌이 살아 있는 발효의 맛이 매력이다. 보이차도 비슷하다. 둘 다 발효의 맛을 느낄 수 있어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했다”고 정 대표는 말했다